윤정선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공간을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들에서 필요한 기억의 부분들을 정리한다. 이것을 작가가 직접 재배치하고 기억 속 감정을 색으로 표현한다. 작가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작품속 공간은 실제 존재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윤정선의 작업 어디에서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며 배경이 최소화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하거나 사라지는 사람과 주변 환경을 소거하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왜곡을 시적 허용처럼 사용하여 개인적인 기억을 남긴다.

작가는 비밀 일기를 쓰는 것처럼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언어를 통해서 그 공간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대 그 공간을 아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기억이기도하다. 이 작품들에 담겨 있는 한 사람의 일대기에 대중은 함께 공감하며 스스로의 삶을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윤정선, 0708 09_07, 2010

대학을 졸업한 2000년대 초반, 윤정선의 작업은 대부분 무채색이었다. 회색빛 영국의 하늘과 회색빛 중국 거리에 작가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작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머무르며 자신의 색이 섞이지 못하는 외로움을 그림으로 그렸다. 북경 유학 이후 작품 속 회색빛 거리에 붉은 색, 노란 색, 파란 색과 같은 원색을 사용한 오브제가 등장했다. 사람이 없는 공간 속 원색의 오브제는 그 공간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존재로 출현했다.

 

윤정선, 옛기억, 2006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가진 것은 북경 시리즈이다. 자금성 지붕의 금박, 붉은 벽과 문은 모두 작가에게 낯선 색이었다. 이 색을 통해 작가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은 화려한 황궁은 청조의 쓸쓸한 마지막과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에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윤정선, 엠볼리움, 2014(금호미술관 전시전경, 저자 촬영)

 

엠볼리움은 작가의 야경 시리즈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야경을 그렸다. 작가는 이 시기 그림이라는 존재 자체가 더 이상 자신의 친구가 아니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존재였다고 회고한다. 피곤한 일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거리에 보이는 불빛에 작가는 그날의 감정을 투영했다.

명동성당 파밀리아 채플의 밤, 자욱한 어둠 속 채플 앞에 조명이 빛나고 있다. 바닥에 반사되는 빛은 보라, 분홍, 파랑 등 색깔에 그날 작가의 감정이 담겨 반짝거린다. 어두운 건물과 빛에 반사되어 더 밝게 빛나는 바닥이 만들어내는 콘트라스트가 인상적이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자리한 밤 시간은 마치 극 사이에 끼어든 막간극(엠볼리움)처럼 일상에서 분리된 시간이다. 이 순간에 집중한 작업들은 작가가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치열하게 작품과 작가의 관계, 화가로서의 삶을 고민한 기록이었다.

 

윤정선, 금호미술관 전시 전경(저자 촬영)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익선동과 삼청동을 그렸다. 익선동과 삼청동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이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주거지였다. 특히 익선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옥을 일본식으로 바꾸어서 거주지로 사용한 역사적인 아픔이 묻어있는 곳이다. 일본식의 타일 담장과 한옥 지붕이 있었던 삶의 거리는 최근 상업 지구로서 변모했다. 더 이상 그 시절의 길목은 사라졌지만 일부의 남아있는 벽으로 그 흔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시점부터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다. 자신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 자신을 지켜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며 부모님과 고향 서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익선동은 남아 있는 것, 남아 있을 것을 찾으며 기록하는 작가의 발걸음이 무색하게 빠르게 변화했고, 결국 이제 모든 것이 바뀐 거리에는 지붕만이 남았다.

 

 

최근 작가는 덕수궁을 그렸다. 덕수궁은 대한제국기 황실의 마지막 궁궐이면서 동시에 서양 건축과 문물이 들어왔던 독특한 장소이다. 한옥 사이에 들어선 석조전의 당당하고 이국적인 모습 너머에는 주권을 잃은 나라의 슬픔이 존재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공사들과 가배를 마시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때론 좌절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윤정선에게 이곳은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곳이면서 국전이 열리면 달려가 작품을 감상하던 곳이 되었다. 그녀는 돈덕전 뜰 앞을 날아다니던 공작새를 기억하고 있다. 석조전 앞 분수대를 그리면서 윤정선은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덕수궁은 곧 외국의 영향을 끝없이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본질을 키웠던 윤정선 스스로를 그린 것이다. 작가 윤정선이 시작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유년기가 숨 쉬는 이 공간은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된다. 이 색의 향연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기억하는 많은 시간들을 작품에 쏟아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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